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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춘 11화 | 약속했던 곳

삼춘

제11화. 약속했던 곳

아침 햇빛이 거실 바닥까지 들어와 있다.

중원은 식탁 끝에 앉아 휴대전화를 내려다본다.

화면에는 어젯밤부터 몇 번이나 확인한 사진이 떠 있다.

누나와 매형.

조금 더 어린 진이와 환이.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자신.

사진 뒤편에 적힌 숫자.

11 / 14

날짜가 아니다.

박정호의 말이 떠오른다.

중원이는 보면 알 거라던 말.

중원이 사진을 뒤집는다.

아래쪽에 적힌 누나의 글씨.

중원아. 우리가 처음 약속했던 곳.

어젯밤 떠오른 기억이 다시 스친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다.

어린 중원이 집을 뛰쳐나간다.

별것 아닌 일이다.

화가 나고, 어린 마음에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누나는 찾아온다.

젖은 머리카락을 얼굴에 붙인 채 한참을 뛰어다니던 누나가 오래된 시립도서관 앞에서 중원을 발견한다.

누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중원의 손을 잡고 말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혹시 우리가 서로를 못 찾게 되더라도.

여기서 만나자.

중원은 사진을 내려놓는다.

기억이 맞다면 장소는 하나다.

하지만 그곳에 왜 11과 14가 필요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방문이 열린다.

환이가 먼저 나온다.

교복 셔츠 한쪽이 바지 밖으로 빠져 있다.

중원이 환이를 본다.

“그건 뭐냐.”

환이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다.

“패션.”

“넣어.”

“요즘은 이렇게 입는데.”

“넣어.”

환이가 투덜거리며 셔츠를 집어넣는다.

뒤이어 진이가 나온다.

가방을 멘 진이는 평소보다 말이 없다.

중원은 진이를 한번 본다.

“긴장돼?”

“뭐가.”

“학교.”

“안 긴장돼.”

대답은 빠르다.

그래서 더 티가 난다.

환이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말한다.

“누나 어제부터 긴장했어.”

“너 조용히 해.”

“가방도 세 번 쌌잖아.”

진이가 환이의 등을 툭 친다.

“아.”

중원이 피식 웃는다.

잠시 뒤 세 사람은 집을 나선다.

오랜만의 등교다.

소설 삼춘 11화 이중원이 진이와 환이의 등굣길을 지켜보는 장면

학교 앞은 평범하다.

학생들이 몰려들고, 교문 앞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맞는다.

차들이 잠깐씩 멈췄다가 빠진다.

중원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다.

환이가 먼저 안전벨트를 푼다.

“삼춘.”

“왜.”

“오늘 데리러 와?”

중원이 환이를 본다.

“가능하면.”

“가능하면이 뭐야.”

진이가 옆에서 대신 말한다.

“일 있으면 못 온다는 거잖아.”

중원은 잠시 말이 없다.

진이가 차 문을 연다.

그러다 다시 중원을 본다.

“오늘 늦어?”

“아니.”

“진짜?”

“연락할게.”

진이가 눈을 가늘게 뜬다.

“또 말만 하지 말고.”

환이가 웃는다.

“누나가 삼춘 못 믿네.”

“넌 가.”

진이가 환이의 등을 밀어낸다.

두 아이가 교문 쪽으로 걸어간다.

몇 걸음 가지 않아 환이가 친구를 발견하고 뛰어간다.

진이는 그런 환이를 따라가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본다.

중원은 그대로 서 있다.

진이가 손을 살짝 흔든다.

중원도 손을 든다.

그제야 진이가 교문 안으로 들어간다.

중원의 표정에서 잠깐 힘이 빠진다.

평범한 아침이다.

그래야 한다.

중원은 차로 돌아가려다 멈춘다.

길 건너편.

회색 SUV 한 대가 서 있다.

운전자는 보이지 않는다.

학교 앞에 차가 서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중원은 그냥 지나친다.

세 걸음.

다시 멈춘다.

후사경.

차량 번호.

그리고 조수석 유리 오른쪽 아래에 붙은 작은 스티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며칠 전.

집 근처 골목이다.

색상은 다르다.

차종도 다르다.

하지만 같은 위치에 비슷한 표식이 있다.

소설 삼춘 11화 학교 앞 수상한 차량을 발견한 이중원이 감시를 의심하는 장면

중원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 순간 SUV가 움직인다.

급하지 않다.

너무 자연스럽게 교차로를 빠져나간다.

중원은 쫓지 않는다.

대신 번호판을 외운다.

휴대전화를 꺼낸다.

불독에게 전화한다.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된다.

“왜.”

“차 하나 확인해줘.”

“번호.”

중원이 번호를 불러준다.

“뭔데?”

“학교 앞.”

잠시 침묵한다.

불독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애들?”

“응.”

“확실해?”

중원은 멀어지는 차량을 바라본다.

“아직.”

“그런데 나한테 전화부터 했고?”

“확인해.”

“알았다.”

전화가 끊어진다.

중원은 다시 학교를 바라본다.

진이와 환이는 이미 교실로 들어간 뒤다.

표정이 굳는다.


한 시간 뒤.

중원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불독이다.

“등록 자체는 정상이다.”

중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근데 차량 정보가 안 맞아.”

“어떻게.”

“등록된 건 흰색 차량이야. 연식도 달라.”

중원의 눈이 가늘어진다.

“번호판만 복제했네.”

“그렇게 봐야겠지.”

“소유자는?”

“평범해. 너랑 아무 관계 없어.”

중원이 잠시 생각한다.

불독이 먼저 묻는다.

“아레스냐?”

“모르겠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마.”

중원은 바로 대답한다.

“학교는 보내.”

“야.”

“누나 죽은 뒤에 애들 계속 집에 있었어.”

“상황이 달라.”

“그래서 또 가둬?”

불독이 말이 없다.

중원이 낮게 말한다.

“애들 인생까지 저 새끼들한테 뺏길 순 없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보호만 붙여.”

“공식으로?”

중원이 곧바로 대답한다.

“아니.”

그 한마디에 불독도 의미를 알아듣는다.

국의 정식 경호 체계를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몇 명 필요해.”

“눈에 안 띄게.”

“중원아.”

“애들은 몰라야 돼.”

불독이 숨을 내쉰다.

“알았다.”

“학교하고 집. 이동 동선만.”

“명현이는?”

중원이 잠시 생각한다.

“내가 얘기할게.”

“이모는?”

“다시 확인해줘.”

“국에서 이미 검증한 사람이야.”

“다시.”

불독이 잠깐 침묵한다.

“너 이제 우리 쪽도 못 믿냐.”

중원의 시선이 차가워진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춘다.

“확인하는 거야.”

불독은 더 묻지 않는다.


오후.

중원은 오래된 시립도서관 앞에 서 있다.

건물은 기억보다 작다.

외벽은 여러 번 덧칠돼 있고 입구도 바뀌어 있다.

그래도 계단은 그대로다.

중원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누나가 우산 하나를 들고 이 계단을 뛰어 올라온다.

젖은 운동화.

화난 얼굴.

그리고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

그 기억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멈춘다.

아까부터 따라붙던 소리다.

중원은 돌아보지 않는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였어요?”

중원이 돌아본다.

명현이다.

“왜 왔어.”

“따라왔죠.”

“누가 따라오래.”

“말 안 하고 혼자 나가는 사람을 그냥 둬요?”

중원이 한숨을 쉰다.

명현이 건물을 올려다본다.

“누나분하고 약속했던 곳?”

중원이 대답하지 않는다.

명현이 중원을 본다.

“맞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간다.

도서관은 일부 공간만 운영되고 있다.

오래된 열람실은 자료보관실로 바뀌어 있다.

중원은 천천히 내부를 둘러본다.

소설 삼춘 11화 이중원과 명현이 오래된 도서관에서 11 14 단서를 추적하는 장면

11.

14.

숫자를 떠올린다.

복도 끝 안내판.

자료실 1.

자료실 2.

보존서고.

중원은 걸음을 멈춘다.

벽면에 작은 금속 표지들이 붙어 있다.

서가 번호다.

9.

10.

11.

중원이 11번 서가 앞으로 간다.

명현이 뒤따른다.

“11.”

중원이 서가를 따라 걷는다.

칸마다 작은 숫자가 붙어 있다.

12.

13.

14.

중원이 멈춘다.

명현이 작게 말한다.

“11에 14.”

중원은 아무 말 없이 책들을 바라본다.

오래된 자료집 사이에 유독 한 권이 앞으로 조금 나와 있다.

중원이 책을 잡는다.

두꺼운 지역 기록집이다.

책을 꺼내자 뒤쪽에 작은 봉투 하나가 떨어진다.

명현의 표정이 달라진다.

중원이 몸을 낮춰 봉투를 집는다.

누나의 글씨다.

중원아.

그 세 글자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다.

중원의 손이 잠시 멈춘다.

명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중원이 봉투를 연다.

안에는 작은 저장매체 하나.

그리고 접힌 종이가 있다.

소설 삼춘 11화 이중원이 도서관에서 누나가 남긴 저장매체와 편지를 발견하는 장면

중원이 펼친다.

짧다.

중원아.

이걸 네가 찾았다면 내가 직접 말할 수 없는 상황일 거야.

이건 국 장비에 연결하지 마.

그리고 박정호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마.

중원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서 멈춘다.

아무도 믿지 마.

바로 옆에는 명현이 서 있다.

중원은 종이를 접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다.

침묵.

명현이 천천히 중원을 바라본다.

“국 장비에 연결하지 말라니.”

중원은 저장매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누나가 알고 있었어.”

“뭘요.”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걸.”

명현이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중원은 대답 대신 서가 뒤쪽을 살핀다.

먼지 사이.

누군가 최근에 만진 흔적이 있다.

선반 가장자리의 먼지가 일정한 구간만 지워져 있다.

중원이 손가락으로 훑는다.

“누가 왔다 갔어.”

“우리보다 먼저?”

“아니.”

중원이 책이 놓여 있던 공간을 바라본다.

“찾지는 못했어.”

명현이 저장매체를 본다.

“어디서 열 거예요?”

“국 장비는 안 돼.”

“그럼?”

중원이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내가 준비할게.”

“혼자?”

중원이 명현을 본다.

명현도 피하지 않는다.

잠시 뒤 중원이 먼저 시선을 돌린다.

“같이.”

명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다.


도서관을 나서는 길.

중원은 계단 위에서 거리를 한 번 훑는다.

낯선 차도, 오래 서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한 번 더 본다.

명현이 묻는다.

“아침에 학교 앞에서 뭐 봤죠?”

중원이 멈춘다.

“불독한테 들었어?”

“네.”

중원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그 양반 입이 점점 가벼워지네.”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간다.

명현이 다시 묻는다.

“아레스라고 생각해요?”

“가능성은 있어.”

“아이들 때문에?”

중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명현이 걸음을 멈춘다.

“선배.”

중원이 돌아본다.

“애들을 본 거라면 얘기가 달라져요.”

“알아.”

“학교 계속 보낼 거예요?”

“응.”

명현이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중원을 본다.

중원이 말한다.

“겁먹었다고 애들 삶을 또 바꿀 순 없어.”

“대신?”

“보호 붙였어.”

“누구.”

“불독이 알아서 할 거야.”

명현이 곧바로 묻는다.

“국 사람?”

중원이 고개를 젓는다.

명현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다.

“그 얘기, 진심이었네요.”

중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잠시 후 말한다.

“명현아.”

“네.”

“당분간 애들한테 자주 가줘.”

명현이 중원을 본다.

“부탁하는 거예요?”

“응.”

이번에는 명현이 농담하지 않는다.

“알았어요.”

중원이 먼저 걸어간다.

명현이 그 뒤를 따라간다.


같은 시각.

창문 없는 방.

빛을 낮춘 통제실 안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화면에는 지도와 이동 기록, 알아보기 힘든 감시 화면들이 흘러간다.

어느 화면에도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소설 삼춘 11화 어두운 ARES 통제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감시 작전을 진행하는 장면

남자 하나가 낮게 말한다.

“눈치챈 것 같습니다.”

뒤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묻는다.

“ZERO가?”

“차량을 확인했습니다.”

“추적은?”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침묵.

뒤쪽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학교는 계속 다니나?”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보호가 붙을 겁니다.”

“붙겠지.”

“그럼 계획은 중단합니까?”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누가 중단하라고 했지?”

“경계가 강화되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남자가 잠시 말이 없다.

“우리가 애들이 필요해서 보는 줄 알아?”

상대가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ZERO는 죽이면 안 돼.”

“저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해.”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고.”

다시 침묵.

“멈추라고 할 때 멈추게 만들어야 하니까.”

상대가 묻는다.

“아이들을 이용하겠다는 겁니까.”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걸 쥐는 거야.”

“진이랑 환이는 제거 대상이 아니다.”

“그럼.”

“보험이지.”

“중원을 통제할 수 있는.”

화면 한쪽에는 학교 정문이 작게 떠 있다.


저녁.

진이와 환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있다.

환이는 숙제를 펼쳐놓고 휴대전화만 보고 있다.

진이가 환이의 휴대전화를 빼앗는다.

“야.”

“숙제해.”

“하고 있었거든.”

“뭘.”

“정신적 준비.”

현관문이 열린다.

두 아이가 동시에 고개를 든다.

중원이 들어온다.

환이가 가장 먼저 말한다.

“왔다.”

진이는 아무 말 없이 중원을 본다.

중원이 신발을 벗는다.

“왜.”

진이가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그러더니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린다.

중원은 잠깐 진이를 바라본다.

아침에 들은 말.

또 말만 하지 말고.

중원은 거실로 들어간다.

소설 삼춘 11화 저녁 집에서 숙제하는 진이와 환이를 바라보는 이중원의 장면

탁자 위에는 평범한 학교 알림장과 문제집이 놓여 있다.

그 사이로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보호선이 만들어지고 있다.

학교 앞.

집 근처.

아이들의 이동 경로.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의 시선.

중원은 주머니 속 저장매체를 만진다.

중원은 조용히 진이와 환이를 바라본다.

환이가 입을 연다.

“삼춘.”

“왜.”

“내일도 학교 가도 되지?”

중원은 잠깐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가.”

“진짜?”

“응.”

환이가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다가 진이에게 손등을 맞는다.

중원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아이들이 평범하게 살게 하는 것.

그것까지 지키는 게 이제 자신의 일이다.

중원은 다시 주머니 속 저장매체를 쥔다.

그리고 생각한다.

누나.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제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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